개취(개인적 취향)의 발견
나는 <여행의 이유>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서인지, 김영하의 시선을 곰곰히 천천히 살피면서 책을 읽었다. 지금껏 누구의 여행기도 이처럼 상세히 생각하면서 꾸준히 읽은 적이 없었다. 아마도 다른 이들의 여행기는 깊은 자기내면의 성찰보다는 여행지와 갖가지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등 외부에 집중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치 공부하듯이 여행기를 읽거나, 정작 가본적도 없고 딱히 가고싶다는 열망도 없이 지리공부하듯 책을 읽다가 그냥 덮어버리곤 했던 기억이 많다.
"이 사람은 이런시각으로 글을 쓰는구나, 내 취향과 비슷한건지, 남의 여행기가 끝까지 읽히다니 뿌듯하네!" 이 책은 이런식으로 건조하게 읽혔고, 잠잠히 나 자신을 느끼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이끌었다. 딴 생각없이 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해준, 깔끔하고 명료한 작가의 시선과 필체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 김영하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을 알았으니, 문득 그리워질 때 먹고 싶어지는 음식처럼, 때때로 그리워지면 찾아가서 그의 글을 읽을 것 같다. 그가 나에게 또 하나의 영혼의 메뉴를 만들어 준 것 같아 너무 좋다. 게다가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고, 또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작가라서 동지의식마저 느껴진다. 만약 내가 앞으로 글을 쓰게 된다면, 나도 이런식의 글쓰기를 할 것도 같다는….뭔가 글작의 개취를 찾은 느낌이 든다.
밑줄과 생각
나는 곧 이 세계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나 내가 서 있는 이 불안정한 화산도와 해협, 뜨거운 바다는 오래도록 남아 전설을 생산하리라
>> 그리고 또 다른 인류가 그 전설을 듣고 보고 감탄하리라!
리파리는 두 얼굴의 섬이다. 잠깐 왔다 가는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얼굴과 오래 남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있다.
>> 우리의 얼굴도 그러하다. 그저 보여주는 얼굴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얼굴은 사뭇 다를 수 있다. 그것이 반드시 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 이외의 지역에서 그리스연극을 거의 원형대로 공연하는 곳은 현재로서는 시칠리아밖에 없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 연극을 이천 년 전 공연된 세팅 그대로 볼 수 있는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 좋은 정보!, 시칠리아에 가보고 싶은 또 한가지 이유이다.
신랑은, 간데없이 혼자 서 있는 팔 없는 신부의 인형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으며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버려두면 안 된다고'....
>>나에게 있는 아름다운 것들,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는 사랑스럽고 귀한 것들도, 방치하거나 버려두면 아무 소용없는 것과 같다. 그저 보듬고 살펴주고 손길을 줘야 그 모든 것들에 의미가 그대로, 또는 더 큰 감동으로 유지되는 것이지. 제일 먼저 나 자신을 그렇게 해줘야 하는 이유다. 날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변덕스럽거나 변화에 민감해서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나는 나 자신과 죽을 때까지 함께 할테니…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자!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 가이드북에 있던 이탈리아 속담이라며 작가가 시칠리아를 떠나는 벳머리에서 아내에게 해준 말.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 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 이래서 젊음을 찬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마음이 젊은 노인은, 낯선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와 자신의 것으로 여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갖춘, 정신이 성숙한 인간집단이다.
서평
시칠리아에서 장기체류를 하면서, 요즘 말하는 "XX "XX에서 한 달 살기" 같은 여행에 대한 느릿느릿한 기록이다. 첫 출발부터, 시칠리아에 도착하고 적응하는 모든 과정을 공유함으로써, 시칠리아의 지형과 공기 그리고 분위기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느긋함이 행간에 가득 녹아 있다. 그래서 마음 한편에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시칠리아섬의 미치도록 아름다운 이른 아침과,, 오후 황혼의 풍경까지 거침없이 마음속에 그려졌다. 책만 읽었을 뿐인데, 방구석에서 작가와 함께 지중해 여행을 하는 듯, 느긋하고 편안하게 여행을 하는 듯했다..
특히, 시칠리아의 정직한 숙소 주인과 동네 마켙과 주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따뜻하고 유쾌하고 좋았다. 진짜 로컬여행의 맛을 본 것처럼, 좀 더 가깝고 친숙하게 시칠리아를 느끼게 해 주었다.. 여행이 아닌 그곳에 얼마간 거주하고 온 듯, 강한 인상을 남겨준 장면들이었다. 이름도 아름다운 시칠리아를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아야겠다는 소망을, 마음의 책갈피로 끼워두고 책을 덮었다.